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는 말은 허구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실성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 체제 전복적인 표현이다.
전복이란 말은 삶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끼며 모든 일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만사에 그리해야 마땅한 방식이 지켜지도록 공권력의 자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소설은 “모든 일이 늘 하던 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어떨까?” 라고 묻는 데에 그치지 않고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일이 흘러갈 경우 펼쳐질 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며, 이로써 뭐든 지금처럼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기반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렇게 상상력과 원리주의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순전히 창작된 상상의 세계는 종교라든가 여타 우주론과 여러모로 비슷한 일종의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사성은 전통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불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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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판타지 문학을 비교하더라도 둘은 오직 아주 심오하며 일반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한 수준의 정신 상태와 서로 연관이 있을 뿐이다. 꿈이 지적인 통제를 벗어난다. 서사적으로 비논리적이고 불안정하다. 꿈에 심미적 가치가 있다면 그건 우연의 결과이다. 반면 판타지 문학은 여타 언어로 된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지적인 면과 심미적인 면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판타지 소설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완전한 이성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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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판타지 소설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로서는 과학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쉽사리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과 판타지는 둘 다 아주 지대한 부분을 불확실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다. 물론 과학자들은 만사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어떨까를 상상하지 않고 어째서 만물이 이처럼 작용하는지에 의문을 가진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가 서로 상반되는 작업일까? 우리가 가진 관례, 신념, 통설, 현실구조에 의문을 품는 방식만으로는 현실에 직접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갈릴레오가 했던 말, 그리고 다윈이 했던 말은 ‘꼭 우리가 알던 방식대로일 필요는 없다.’가 아니었던가.
🔖 여성 집단이 합심하여 거대한 중심 세력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적 기관들이 집합적으로 가하는 매우 끈질긴 압력이 여성들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남성의 단합이 권력 쟁탈의 과정에서 생긴 공격적이고 철저한 통제에 의해 만들어진 반면 여성의 결속력은 상호 협력의 바람과 필요에 의해 파생된다. 그리고 때로는 박해로부터의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다져지기도 한다. 모호함은 유동성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여성의 상호의존성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성, 임신 양육, 가족 부양, 남성 부양 등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을 위협한다고 여겨질 경우에는 너무나도 쉽게 상호의존성의 존재 자체를 간단히 부인해 버린다. 여성은 충성심도 없고 우정이 뭔지도 모른다는 등의 말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공포에 빠져 있을 때는 부인이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여성의 주체성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남성 및 남성 지배의 혜택을 받는 여성들의 조롱 섞인 증오에 직면한다. 여성 혐오는 결코 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남자들만큼, 혹은 남자들보다 더 강하게 스스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한다.
여성의 주체성과 상호의존성을 예찬하며 두려움을 이용했던 1970년대의 페미니즘은 불길처럼 일어났다. 우리는 ‘자매애는 강하다’라고 외쳤고 여성들은 그 말을 믿었다.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이 화력을 더할 성냥을 찾기도 전에 겁에 질린 여성 혐오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가정이 무너진다며 울부짖었다.
자매애의 본질은 그 힘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형제애의 권력과 완전히 다르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그동안 목격한 건 그 힘이 미칠 영향력의 맛보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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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연합을 목표로 일하고자 하는 여성들이라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규정하기 어렵지만 소중하고도 끈질긴 자신들의 연대를 남자들 못지않게 인식하고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페미니즘은 이어지고 있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여성들끼리 혹은 남성과 함께 일하는 곳 어디에나 자리 잡아야 한다.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모두 남성적 가치의 정의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특정 성에 배타적이기를 거부하며, 상호 의존성을 지지하며, 공격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와해시켜야 한다. 또한 항상 자유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과학자들에게 진화론은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다. 철저하게 검증되고 증거가 충분하더라도 이론은 이론이다. 추가적인 관찰을 통해 얼마든지 바뀌거나 보완되고 다듬어지거나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은 신조가 아니다. 신념의 파편이나 도구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그걸 이용하며 실행하고 심지어는 믿기라도 하듯이 옹호한다. 하지만 그건 진화론을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진화론을 수용하고 이용하고 부적절한 공격에 대항하여 방어한다. 왜냐하면 진화론이 지금껏 반증을 위한 엄청난 도전들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진화론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가설이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설명이 필요한 일들을 해석해 준다. 인간 정신을 사실에 근거한 발견과 이론적 상상의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어주었다.
다윈의 이론은 우리의 현실 인식, 잠정적이기만 했던 지식을 방대하게 확정해 놓았다. 그의 이론을 시험하고 있는 한, 그리고 시험할 능력이 되는 한, 우리는 항상 그것을 개선해 나가며 진정한 지식 — 훌륭하고 풍부하고도 아름다운 통찰력 —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밝혀진 진실이 아니라 애써서 얻은 진실로서 말이다.
영성의 영역에서는 인간이 지식을 획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오직 선물로서 지식을 수용한다. 믿음이라는 선물, 믿음은 훌륭한 단어이다. 믿는 진실 또한 훌륭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가이다.
나는 우리가 사실관계의 문제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그만 사용하길 바란다. 종교적 신의와 세속적인 희망의 문제로, 원래 속한 곳에 남겨두길 바란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불필요한 고통을 아주 많이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